▦ 한국의 문화재/경주문화재

보물 제121호 - 굴불사지 석불상(掘佛寺址 石佛象)

아카바* 2012. 7. 17. 21:39

 

 

2012.7.15

 

 

굴불사지 사면석불상 (掘佛寺址四面石佛像)

보물 제121호 / 경주시 동천동 산 4

 

 

 

경주 동북쪽의 소금강산 자락에 있는

백률사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굴불사지 사면석불상.

 

 

 

높이 350cm. 경상북도 경주시 소금강산의 백률사(栢栗寺)로 가는 길목에 있는 것으로

이곳은 굴불사라는 절터로 알려져 있는데 그 유래가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사불산굴불산만불산

(四佛山掘佛山萬佛山)조에 보인다.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에 행차할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그곳을 파게 했더니 4면에 불상이 새겨진 돌이 나와서 그곳에 절을 세우고 굴불이라 절 이름을 칭했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에 의해 사면석불 조성연대의 하한을 경덕왕대로 추측할 수 있다.

1981년 실시된 발굴조사에 의해 그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불상들의 대좌와 주변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동면(東面)의 좌불상(坐佛像)은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고 왼손에는 약합을 든

 약사여래(藥師如來)이다.

 

 

 

 

 

본존상은 고부조로 새겼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올렸다. 양협시보살상은 다른 돌에 환조(丸彫)해 세웠는데,

왼쪽 보살상의 보관에 화불(化佛)이 있고 정병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觀音菩薩)임을 알 수 있다.

 

 

 

 

 

남면(南面)에는 원래 삼존불이 부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오른쪽의 보살상은 흔적뿐이고 현재는 머리가 없는 본존불입상과 보살입상만이 있다.

특히 이 남면의 불상들은 법의가 매우 얇게 몸에 밀착되어 있고, 가는 허리와 다리의 육감적인 선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게 조각되어 있어서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북면(北面)에는 줄새김[線刻]으로 된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 관음보살입상과

부조로 새겨진 보살입상이 나란히 있다.

 

북면의 돋을새김으로 된 보살입상은 높이 틀어 올린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손을 든 자세나 천의를 두른 모습이 남면의 보살상과 매우 비슷한 형식이지만, 보존 상태는 별로 좋지 않다. 그 왼쪽에 선각으로 된 보살상은 여섯 개의 손이 있는데, 두 개는 양어깨 위로 올리고, 두 개는 가슴 앞에 모으며, 두 개는 양옆으로 내려진 것이 확인된다. 양쪽 귀 옆으로 두 개의 보살면이 있고, 머리 위에 5면, 그 위에 2면, 맨 위에 1면이 있어, 모두 11면의 얼굴을 가진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을 표현하였다. 이는 관음상의 변화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능력을 발휘하여 다방면의 신통력을 보여 주는 것을 나타내는데, 약간의 주술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러한데 실제로 보니 십일면육비관음보살상은  

오랜 세월에 마모되어 형체를 잘 알아볼수 없었다.

 

 

 

보물 121호로 지정된 석조사면불상이 남아 있는 굴불사 절터.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을 드러내면 그 맑은 하늘이 진면목인가,

혹 비를 내리는 그 모습이 하늘의 진면목인가. 여름날 소나기가 그치고 떠오른 무지개는

원래 그곳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우리 눈의 착각이라고만 할 수 있는 것인가.
본래 그 반야般若의 진리는 나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누구나 지니고 있을 불성佛性 또한 생겨났다거나 혹은 없어졌다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때 조성한 경주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석불四面石佛의 유래가 그러하다.
경덕왕이 백률사百栗寺로 놀러가는데 산 밑에 닿으니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나므로

그곳을 파게 하여 큰 돌을 꺼내니 돌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이 새겨져 있었음으로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굴불掘佛(부처를 파내다)이라 하였다는 것이 굴불사 사면석불에 대한 유래의 전부이다.

사면에 부처님을 새긴 일이야 이미 경덕왕대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것이니 굴불사 사면석불도

동쪽에는 동방유리광 교주인 약사부처님을 모셨고, 서면에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상주하시는 아미타불,

남면에는 석가부처님과 북면에는 앞으로 오실 미륵부처님을 모셔 조성하였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은 불교와 관련이 깊은 군주이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신라의 이적들이

경덕왕 때 이루어진 일이다. 어느 날은 하늘에 해가 둘이 나타난 적이 있어,

꽃을 뿌리는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된다고 하여, 준비할 때 월명月明이라는 스님이 나타나

노래를 지어바쳐 부르도록 하여 그 일을 잠재웠다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것이 하늘의 해였던지, 혹 또다른 왕을 일컫는 것이었는지 천여년 전의 일이라 알 수 없으나

이 일로 경덕왕의 지극한 불심이 더해졌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일과 굴불사 사면석불 조성의 선후先後는 정확히 알 수는 없겠으나 땅속에서 들려오는

염불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군주라면 그 마음의 귀와 눈이 밝은 이였음에는 틀림없다.
사면석불이 땅에 묻혀 있던 그 시간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네 분의 부처님과 여덟 분의 보살은

이미 천삼백년을 세상에서 중생들에게 경덕왕에게 들려준 그 염불소리를 하시고 있는 셈이거늘

중생의 총명聰明하지 못한 눈과 귀가 그것을 보고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매미가 세상을 바라고 나와 노래하기 시작하니 그 매미는 7년을 땅속에서 기다리고 기다려

불과 한 여름을 살고 간다. 매미는 가을을 알지 못하고, 그 이듬해 여름을 알지 못한다.

또한 아침에 피어나 저녁이 되기 전 시드는 버섯은 저녁 하늘 붉은 노을의 화려함과

밤 하늘 쏟아지는 별빛을 보지 못하니, 우리의 인생이 가을을 알지 못하는

매미와 저녁을 알지 못하는 버섯에 크게 다르다 할 것이 어디 있으랴.

다만 매미가 밝은 세상에 나와 노래하는 그 여름만을 중요하다 할 것은 아니요,

땅속에서 기다린 7년의 긴 기다림도 없어서는 안 될 시간이기에

중생들의 서원誓願과 수행이 여래의 미소만큼이나 아름답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2003년 8월 월간해인 258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