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금강산 백률사와 이차돈

2012. 7. 17. 21:40▦ 한국의 문화재/경주문화재

 

 

 

2012.7.15

 

백률사

 

백률사는 경주 동천동에 있는 사찰로 삼국시대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던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사찰이다.

 

 당시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잘린 목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진 곳에 세운 절이다.

문헌에는 자추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후에 백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백률사에는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불상인 국보 29호로 지정된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이 있었고,

 통일신라 헌덕왕대에 이차돈을 추모하여 세운 비석도 있었다.

 

 절의 규모는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된 대웅전을 제외하고는 건물은 많이 두고 있지 않다.

사찰 주위에는 옛 건물에 쓰였던 건물 초석 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백률사 아래에는 보물 121호로 지정된 석조사면불상이 남아 있는 굴불사 절터가 있다.

 

굴불사는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경덕왕이 백률사를 행차할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그곳을 파게 했더니 4면에 불상이 새겨진 돌이 나와서  절을 세우고

 지금은 사면불상을 중심으로 주위에 옛 절의 건물들을 세웠던 초석들이 남아 있다.

 

 백률사와 굴불사는 법흥왕대에 이차돈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서 세운 오래된 사찰이지만

경주의 다른 사찰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상당히 작은 편이다.
 

 

 

 

 

 

 

 

 

 

 

 

 

 

 

 

눈에띄는 글귀가 있어 담아왔습니다.

 

 

 

 

 

 

 

 

 

 

 

 

 

 

 

 

 법당 앞마당의 탑이 새겨진 큰 바위

 

당시 탑을 세울자리가 협소해서 바위에 새겼다 함.

 

 

 

 

 

 

 

법당을 바라보고 있는 동자승 상 이 인상적이다.

푸른 천막땜에 색상이 푸르게 나왔네요...

 

 

 

 

 

 

 

 

옛건물의 초석으로 쓰여졌던 흔적들속에 담아본 현재의건물 지붕....

 

 

 

 

 

급히 내려 오면서 담은 백률사 오름길 많이 가파른 계단길

조금 흔들렸다.

 

 

백률사에서 내려 오면서 본 굴불사지 사면석불

 

 

 

 

 

 

 

 

 

 

 

 

 

 경주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 28호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경주박물관에 있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조각된 석당 

 

 

 

법흥왕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절을 세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정의 신하들은 임금의 뜻에 찬성하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이때 반대한 조정 산하들의 이름이 공목, 알공 등이라고 나와 있다.

이들은 임금에게 다름과 같이 반대 이유를 말했다고 한다.

 

“최근에 흉년이 들어서 민심이 흉흉합니다.

또 이웃 나라 군사들이 국경선을 침범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백성들에게 쓸데없는 절을 세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맞서 생존이 걸린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절을 짓자고 하니 반대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때 궁궐에서 자란 염촉, 즉 이차돈이 법흥왕에게 한 계측을 전한다.

“거짓으로 임금의 말씀을 전한 죄를 물어 저에게 벌을 주시고 목을 베시면

만백성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임금님의 말씀을 어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형틀을 마련하여 신하들을 꾸짖고 이차돈의 목을 베라고 명령한다.

이차돈은 죽음을 앞두고 하늘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큰 성인이신 임금님께서 불교를 일으키려 하시니 저는 목숨을 돌보지 않고 속세에 맺은 인연을 모두 버리나니,

하늘이시여, 상서로운 징조를 내리어 두루 백성에게 보여 주소서.”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이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

 

하늘은 사방이 깜깜해지고, 온 천지의 땅이 진동하며 하늘에서 꽃비가 휘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뿐만 아니라 샘물이 별안간 말라서 물고기와 자라가 서로 다투며 뛰어오르고,

곧은 나무가 부러지면서 원숭이들이 떼 지어 우는 등 이상한 일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리고 이차돈의 목은 날아가서 경주 북쪽에 있는 금강산의 꼭대기에 떨어졌다.

 

 

이 일이 있은 뒤 사람들은 이차돈의 목이 날아가 떨어진 금강산에 자추사(현재의 백률사)를 세우고 불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백률사에서는 비석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높이 106센티미터에 여섯 면으로 된 비석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차돈이 순교한지 290년이 흐른 뒤 새겨진 이 비의 글자들이 심하게 마모되어 알 수 없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이차돈이 법흥왕의 명령으로 처형당한 이 이야기에 대한 역사학자의 해석도 분분하다. 특히 스물두 살 청년 이차돈의 순교 원인은 미스터리다. 흔히 두 개의 설이 있다. 절을 새우려는 운동은 법흥왕과 이차돈이 같이 했지만, 조정대신의 반발이 거세자 이차돈이 모든 책임을 지려고 했다는 설과 법흥왕은 점진적으로 불교를 도입하려 하였지만 강경파 이차돈이 법흥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천경림에 절을 세우려다 벌을 받았다는 해석이다.

 

어쨌든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불교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종교다. 그렇다면 이차돈의 순교는 불교의 교리에도 어긋나는 것은 아닐까.작가는 그런 면에서 이차돈의 순교는 조선 후기 천주교의 순교와 맥을 같이한다고 설명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은 태도는 당장 우리 눈앞에 닥친 일이 전부라는 생각을 버리게 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현세적인 것을 넘어서는 더 높은 차원의 이상을 추구하려는 태도를 가르친다. 때문에 작가는 이차돈의 순교는 ‘고대인들의 형이상학적인 혁명’이 아닐까, 하는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오늘 이차돈의 순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속>

 

 

 

 

 

이차돈이 요샛말에 꽃미남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이차돈(李次頓)의 성은 박씨고, 이름은 염촉(猒髑)이라고 한다.

 

흔히 이차돈의 성은 이씨고, 이름은 차돈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차돈은 당시 신라 말로 부르던 이름을 한자의 음을 빌어 적은 이두식 표현이다.

 이차돈으로 적은 것은『삼국사기』이고 『삼국유사』에는 염촉이라 적었다고 한다.

이차돈의 ‘돈’자나 염촉의 ‘촉’은 모두 편의로 붙인 자로 뜻이 없다고 하니,

‘이차’가 원래 음을 살려서 적은 것이고, 이걸 번역하여 ‘염(猒)’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염이라는 글자는 ‘예쁘다, 넉넉하다, 편안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이차돈의 원래 이름은 ‘박 꽃미남’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작가의 해석이다 

 

『삼국유사 끊어진 하늘 길과 계란맨의 비밀』이란 책은 잘 알려지다시피 고려 충렬왕때 승려 일연이 쓴 역사책을 우리 청소년이 쉽게 이해하고 읽을 수 있도록 현대적인 시각에서 해석해 옮겨놓은 책이다. (일연:원저  김현범:글) 에서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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