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尹東柱)의 시세계

2014. 1. 17. 12:06▦ 마음의 쉼터/풍경이 있는 詩

 

1917년 북간도(北間島)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사상범으로 일경에 피체,

19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 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된 윤동주는

일약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쓰여진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

어느 한 편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울분과 자책, 그리고 봄(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연세대학 캠퍼스와 간도 용정중학 교정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1995년에는 일본의 도시샤대학에도 대표작 《서시》를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 기록한 시비가 세워졌다

죽은 다음에 시인으로 불린 윤동주



1945년 2월, 조국의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조선 출신의 한 젊은이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의 차디찬 마룻바닥에서 뜻 모를 외마디소리를 지른 후에 숨을 거두었다.

윤동주 시인이었다.

정확하게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였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 시인' 윤동주로 한국인의 가슴에 또렷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가 생존할 당시엔 아무도 그를 시인이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입을 꼭 다문 고등학생 교복차림으로, 학사모를 쓴 대학생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윤동주가

시인의 호칭을 얻은 것은 옥사하여 무덤에 묻히는 순간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살아생전에 시인으로 등단한 적이 없는 그의 묘비에

'시인 윤동주지묘(詩人 尹東柱之墓)'라고 새겨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 윤하현(1875-1948)이 "내 손자, 동주의 일생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의 삶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런 묘비를 만든 것이다.

이렇듯 윤동주 시인의 갑작스런 죽음과 비극적인 생애는 그의 고고한 시편들과 함께

윤동주를 순교자적인 이미지로 깊게 각인시켰다.

그가 시인으로 데뷔한 일도 없고 시집 한 권 남기지 않았지만

한국현대시 100년을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명이 됐다.

또한 그의 시비가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 세워질 정도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시인이 됐다.

윤동주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려고 시도했던 적은 있다.

본격적인 유학생활이었던 연희전문 4년을 졸업한 윤동주는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묶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다.

그러나 은사인 이양하 교수 등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하자 자진해서 시집출간을 포기했다.

대신 원고지에 펜으로 써서 3부를 묶는 걸로 아쉬움을 달랬다.

바로 그 시 묶음의 서문 격으로 쓴 시가 오늘날 대한민국 최고의 애송시가 된 <서시(序詩)>다.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윤동주의 시들

윤혜원씨에게 "오빠의 시 중에서 어떤 시를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아무 망설임 없이 <서시(序詩)>를 꼽는다.

"나라를 잃은 젊은이의 깊은 고뇌와 성찰이 순수한 모국어로 담겼고,

거기에다 시인의 결연한 의지가 읽혀서 늘 숙연해진다"고 말한다.

윤씨는 이어서 "오빠가 시를 쓰면서 의도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적절한 시어를 골라 썼겠지만,

오빠와 함께 생활했던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떤 책에는 그걸 윤동주 시의 시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일치한다고 썼더라. 맞는 말이다"면서

좀처럼 하지 않는 윤동주 시에 대한 소견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광명학교 시절, 윤동주 시인과 2년 동안 한 방에서 기거했던

김태균(전 경기대 교수, 현재 캐나다 거주)씨의 다음과 같은 언급도 윤혜원씨의 소견과 일맥상통한다.

"윤동주의 시 전반을 걸쳐서 볼 때 그는 '조선독립운동'이라는 죄명으로 죽었지만

그의 시에는 육사에게서 볼 수 있는 칼날 같은 투지라든가,

만해에게서 볼 수 있는 강철 같은 주의사상은 보이지 않는다.

윤동주의 시는 그것이 곧 그의 생활이고, 그리고 그것들의 바탕은 서정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는 무슨 사상이나 무슨 주의주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를 읽으면 사랑이 생기고, 눈물 나는 참회가 생기고, 그리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이 생긴다.

그의 시어는 대단히 평이하지만 그의 시심에 한 발짝 접근하면 우리는 옷깃을 여미게 된다."    

 

윤동주의 장례식 광경

일제의 고문에 의해

후쿠우카 형무소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윤동주 시인의 장례식 광경

1945년 3월06일 용정 자택에서.

 

-윤동주의 생애-

1917년 ( 1세)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이 파평인 부친 윤영석과, 독립운동가,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누이 김용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910년에는 조부 윤하현이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 윤동주가 태어날 무렵에는 장로직을 맡게 되는데, 윤동주는 태어나자 유아 세례를 받는다. 윤동주는 본명이며 어릴 때 불리던 이름은 해환이다. 뒤에 [카톨릭 소년]지에 동요를 발표할 때 '윤동주(동주)' 또는 '윤동주(동주)'라는 필명을 쓴 젓이 있다. 윤동주의 형제로는 누이 윤혜원, 동생 윤일주(성균관대 교수), 윤광주가 있다.

1925년 ( 9세)

4월 4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에 있는 명동 소학교에 입학. 명동 소학교는 외삼촌 김약연이 설립한 규암서숙을 명동 소학교와 명동 중학교를 발전시킨 것으로, 윤동주가 재학할 당시는 중학교는 폐교된 상태였다. 당시의 급우로는 함께 옥사한 고종 사촌 송몽규, 문익환, 외사촌 길정우 등이 있다.

1929년 (13세)

송몽규 등의 급우와 함께 벽보 비슷한 '세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 이 무렵 썼던 동요, 동시 등의 작품을 발표.

1931년 (15세)

3월 25일, 명동 소학교를 졸업. 송몽규, 김정우와 명동에서 30리 남쪽에 있는 중국인 도시 대랍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

1932년 (16세)

4월,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미션계 은진중학교에 입학. 재학중 급우들과 함께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 선수로도 활약.

1934년 (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 한 대', '내일은 없다' 세편의 시 작품을 쓰다. 이날 이후 모든 자작품에 시를 쓴 날자 명기.

1935년 (19세)

은진중학교에서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 숭실중학 시절 '남쪽 하늘', '창공', '거리에서', '조개껍질' 등의 시를 씀.

1936년 (20세)

숭실중학교 폐교,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 간도 연길지방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지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발표.

1935년 (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입학.

1941년 (25세)

연희전문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을 발표. 12월 27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 19편으로 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미간. 이 무렵 윤동주의 집에서는 일제의 탄압에 못이기고, 또한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함.

1942년 (26세)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 가을(10월 1일)에는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편입.

1943년 (27세)

7월, 첫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교토대학에 재학중인 송몽규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교토 키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됨(7월 14일).

1944년 (28세)

2월 22일 기소되고, 3월 31일, 일제 당국의 재판 결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형(3년 구형)언도받아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1945년 (29세)

2월 16일, 윤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라는 전보가 윤동주의 옥사 사실을 알려옴.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일춘이 일본으로 건너감. 송몽규도 윤동주가 죽은 뒤 23일 만인 3월 10일 옥사. 3월 초, 용정 동산에 안장.

1947년 2월 16정지용, 안병욱, 이양하, 김삼불, 정병욱 등 30여명이 모여 소공동 플로워 회관에서 윤동주 2주기 추도 모임을 갖다.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

1955년 2월 10주기 기념으로 유고를 보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서 간행.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학생회 및 문단, 친지 등이 모금한 돈으로 연희전문 시절에 지내던 기숙사 앞에 시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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