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 김수영
2009. 1. 29. 00:08ㆍ▦ 마음의 쉼터/풍경이 있는 詩
절망 /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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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화를 반성하지 않는 날
화를 가슴에서 꺼내어
앞에 두고 바라본다.
펄떡이는 저것을 어쩌나
구워먹을까
삶아먹을까
갖은 상념으로 다독여 보아도
반성하지 않던 어느 날,
우연히 들린 찻집 문 입구에 적힌 글귀가
내 이마를 친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다'
예기치 않은 순간이었지만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려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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